이이 나오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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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이 나오오키는 1656년에 태어나 1717년에 사망한 인물로, 히코네 번의 제5대 번주이자 에도 막부의 다이로를 두 차례 역임했다. 그는 이이 씨 중흥의 조로 평가받으며, 막부 말기의 이이 나오스케에게 존경을 받았다. 나오오키는 노가쿠에 관심을 보였고, 조슈인 건립과 같은 사회 공헌 활동을 펼쳤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도쿠가와 이에쓰구의 후계 문제와 에도 섬 사건 등 다양한 정치적 문제에 대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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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나오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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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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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명 | 이이씨 |
이름 | 이이 나오오키 |
원어이름 | 井伊 直興 |
가몬 | Hikone Tahibana (No background and black color drawing).svg |
가몬 설명 | 히코네 귤 |
개명 | 기치주로(吉十郎, 아명) → 나오오키(直興) → 나오하루(直治) → 나오모리(直該) |
별명 | 장수공(長寿公) |
법명 | 각옹(覚翁), 전옹(全翁) |
계명 | 장수원각옹지성(長寿院覚翁知性) |
묘소 | 에이겐지(永源寺, 시가현 히가시오미시)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출생 | 메이레키 2년 음력 3월 6일(1656년 3월 31일) |
사망 | 교호 2년 음력 4월 20일(1717년 5월 30일) |
관직 | |
관위 | 정4위상 좌중장, 간몬노카미 |
막부 | 에도 막부 다이로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徳川家綱) → 쓰나요시(綱吉) → 이에노부(家宣) → 이에쓰구(家継) |
번 | 오미 히코네번 |
가계 | |
씨족 | 이이씨 |
친부 | 이이 나오쓰나(井伊直縄) |
친모 | 사쿠라이씨(桜井氏) |
양부 | 이이 나오즈미(井伊直澄) |
형제자매 | 여동생: 아베 마사타케의 정실, 여동생: 나카노 세이자(中野清三)의 정실 |
배우자 | 정실: 없음 |
자녀 | 나오미치(直通), 나오쓰네(直恒), 나오노리(直矩), 나오노부(直惟), 나오사다(直定), 딸 (이이 나오토모(井伊直朝)의 실), 딸 (아베 마사타카(阿部正喬)의 실), 방(房, 산조 기미미쓰(三条公充)의 실), 딸 (기마타 모리카쓰(木俣守吉)의 실, 후에 기마타 모리카(木俣守嘉)의 실), 딸 (마쓰다이라 야스히로(松平康弘)의 실), 딸 (인쿠 모리시게(印具保重)의 실) |
경력 | |
번주 | 히코네번 제4대 번주 (1676년 ~ 1701년), 제7대 번주 (1710년 ~ 1714년) |
2. 생애
메이레키 2년(1656년) 3월 6일 태어났다. 만지 원년(1658년) 아버지 나오오키가 사망하고, 같은 해 히코네 번의 세자였던 이이 나오시게가 폐적되면서, 백부인 이이 나오즈미가 가독을 상속받았다. 간분 12년(1672년) 11월 27일 나오즈미의 양자가 되었고, 엔포 4년(1676년) 나오즈미가 사망함에 따라 가독을 이어받아 히코네 번 제5대 번주가 되었다.
히코네 번주로서 라쿠라쿠엔, 겐큐엔 건조, 영내 항구 개축, 융자 제도 마련, 번사 가계 기록 등 여러 사업을 시행하였다. 겐로쿠 12년(1699년) 히코네 번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구휼에 힘썼다. 번사들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에도 막부에서는 조정에 대한 답례 사절, 닛코 도쇼구 개수 총봉행 등 여러 중책을 맡았다. 겐로쿠 8년(1695년) 11월 28일 에도성 어용방에 입성하여 로주 대우를 받았고, 겐로쿠 10년(1697년) 6월 13일 다이로가 되었다.
겐로쿠 13년(1700년) 3월 2일 병으로 다이로 직을 사임하고, 겐로쿠 14년(1701년) 3월 5일 여덟째 아들 나오미치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그러나 나오미치가 호에이 7년(1710년) 7월에 22세로 요절하고, 열째 아들 나오츠네가 뒤를 이었지만 같은 해 10월에 병사했다. 이에 나오오키는 환속하여 히코네 번 제8대 번주로 재취임했고, 이듬해 쇼토쿠 원년(1711년) 2월 13일 다이로에 재임명되었다.
쇼토쿠 4년(1714년) 2월 15일 열셋째 아들 나오타다가 원복하자 2월 23일 다이로 직을 사임하고 나오타다에게 가독을 물려준 후 은거했다. 교호 2년(1717년) 4월 20일 히코네에서 62세로 사망하여 에이겐지 (시가현히가시오미시)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
메이레키 2년(1656년) 3월 6일, 제3대 히코네 번주 이이 나오타카의 넷째 아들인 이이 나오오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쿠라이 씨이다. 어릴 적 이름은 키치쥬로였으며, 처음 이름은 '''나오오키'''였다.만지 원년(1658년)에 아버지 나오오키가 사망하고, 같은 해 히코네 번의 세자 이이 나오시게(나오타카의 장남)가 폐적되자, 이이 나오즈미(나오타카의 다섯째 아들)가 본가의 가독을 이었다. 간분 12년(1672년) 11월 27일, 조부 나오타카가 나오오키(이이 나오오키)의 아들인 나오오키(이이 나오오키)에게 후사를 잇게 하도록 유언했기 때문에 숙부 나오즈미의 양자가 되었다.[1]
2. 2. 히코네 번주
간분 12년(1672년) 11월 27일, 숙부 이이 나오즈미의 양자가 되었고, 엔포 4년(1676년) 나오즈미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어받아 히코네 번 제5대 번주가 되었다.히코네 번 통치 기간 동안 다음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
- 엔포 6년(1678년), 곤궁과 차용금 지급을 호소한 번사 76명을 추방하였다.[1]
- 엔포 7년(1679년), 가중 법도를 제정하여 가신에 대한 통제를 엄격히 하였다.
- 라쿠라쿠엔과 겐큐엔을 건조하였다. 시모야시키(츠키고텐)에 소상팔경과 오미 팔경을 본떠 만들었으며, 현재 츠키고텐 중 건물 부분을 라쿠라쿠엔, 정원 부분을 겐큐엔이라 칭하고 있다. 1951년, 국가지정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 영내의 비와 호에 면한 마츠바라 항·나가소네 항을 개축하는 등 토목 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 조쿄 2년(1685년), 번사에 대한 융자 제도를 시작하였다.
- 겐로쿠 4년(1691년), 가로 키마타 모리나가에게 명하여 번사의 가계와 유래를 모아 '시츄 유서서'를 편찬하게 하였다.
- 겐로쿠 6년(1693년), 번사에게 상미를 명했다.
- 겐로쿠 10년(1697년) 1월 11일, 추방했던 번사 76명에게 귀참을 명했다.[1] 곤궁이나 타가에의 시관의 결과, 바로 귀참할 수 있었던 자는 23명이었고, 나머지 53명은 병, 이미 사망,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다.
- 겐로쿠 12년(1699년), 히코네 번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구미 지원을 했다.
2. 3. 에도 막부에서의 활동
엔포 8년(1680년) 류마즈메가 되었으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제5대 장군으로 임명된 후 조정에 대한 답례 사절을 맡았다.[2] 엔포 9년(1681년) 에치고 소동으로 개역된 마츠다이라 미츠나가를 에도 저택에서 맡았다.[2] 겐로쿠 원년(1688년) 11월 닛코 도쇼구 개수 총봉행으로 임명되어, 겐로쿠 2년(1689년) 7월부터 겐로쿠 3년(1690년) 7월까지 센다이 번주 다테 쓰나무라와 협력하여 대규모 수복을 완수하였다.[2]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겐로쿠 8년(1695년) 11월 28일 에도성 어용방 입성을 명받아 로주 대우를 받았고, 겐로쿠 10년(1697년) 6월 13일 다이로가 되었다.[2]2. 4. 다이로 역임과 은퇴
겐로쿠 10년(1697년) 1월 11일, 이이 나오오키는 에도 막부의 로주 대우를 받은 데 이어, 같은 해 6월 13일에는 다이로에 취임했다.[1]겐로쿠 13년(1700년) 3월 2일, 나오오키는 병을 이유로 다이로 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2] 사임 이유는 겐로쿠 10년 2월에 계획되었던 닛코 사참의 재원 확보를 위해 다이로로 등용되었지만, 이를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 또한 엔포 8년(1680년)부터 맡고 있던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참예 선도역이 겐로쿠 11년(1698년) 7월 14일부터 중단되었는데, 이 임무를 달성하지 못해 병이 났다고도 전해진다.[2]
2. 5. 재임과 사망
호에이 7년(1710년) 아들 나오미치가 22세로 요절하고, 뒤를 이은 아들 나오츠네도 같은 해 10월에 병사하였다. 잇따른 후계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나오오키는 다음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환속하여 나오가이(直該)로 개명하고 히코네 번 제8대 번주로 다시 취임하였다. 이듬해 쇼토쿠 원년(1711년) 2월 13일에는 다이로에 재임명되었고, 관위도 정4위 상(上) 중장까지 올랐다. 이는 당시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제6대 쇼군으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로, 막부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이 가문이 정권에 참여하여 정국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2]쇼토쿠 2년(1712년) 10월 14일에는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사망하였고, 쇼토쿠 3년(1713년) 3월 26일에 그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제7대 쇼군으로 원복(元服)하자 에보시오야(烏帽子親)를 맡았다. 쇼토쿠 4년(1714년) 2월 15일에 열셋째 아들 나오타다가 원복하자 2월 23일에 다이로 직을 사임하고, 나오타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이후 이름을 나오오키로 되돌린 후, 쇼토쿠 5년(1715년) 12월에 출가하여 젠오(全翁)라 개명했다. 또한 열넷째 아들 나오사다에게도 1만 석을 분여하여 히코네 신덴 번을 창설했다.
교호 2년(1717년) 4월 20일, 히코네에서 62세로 사망했다. 유해는 역대 번주와는 별도로 에이겐지 (시가현히가시오미시)에 묻혔다.
3. 경력
이이 나오오키는 1656년 3월 6일 (구력) 히코네번 제3대 번주 이이 나오타카의 넷째 아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58년 아버지 나오오키가 사망하고, 히코네 번의 세자였던 이이 나오시게가 폐적되면서, 숙부인 이이 나오즈미가 가독을 이었다. 그러나 나오타카가 나오오키의 아들인 나오오키에게 후사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겨, 1672년 나오즈미의 양자가 되었고, 1676년 나오즈미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어받아 히코네 번 제5대 번주가 되었다.
히코네 번주로서 나오오키는 번사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도, 라쿠라쿠엔과 겐큐엔을 건조하고, 비와호에 면한 항구를 개축하는 등 토목 사업에 힘썼다.[1] 또한 번사들의 가계와 유래를 모아 '시츄 유서서'를 편찬하고, 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백성을 지원하는 등 여러 정책을 펼쳤다.
에도 막부에서는 1680년 류마즈메가 되었고,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쇼군이 된 후 조정에 대한 답례 사자를 맡았다. 1688년에는 닛코 도쇼구 개수 총봉행으로 임명되어 센다이번주 다테 쓰나무라와 함께 대규모 수복을 완수하여 공을 세웠다. 1695년에는 로주 대우를 받았고, 1697년에는 다이로가 되었다.
1700년 병을 이유로 다이로 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고,[2] 1701년 아들 나오미치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이후 여러 아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1710년 환속하여 히코네 번 제8대 번주로 재임했고, 1711년에는 다이로에 재임명되었다. 1714년 다시 은거하여 1717년 4월 20일 (구력) 히코네에서 62세로 사망했다.
3. 1. 주요 임관 및 보직
간분 12년 (1672년) | |
---|---|
엔포 4년 (1676년) | 2월 23일: 가독 상속, 번주 취임. |
엔포 8년 (1678년) | |
겐로쿠 10년 (1697년) | 6월 13일: 막부 다이로 취임. |
겐로쿠 13년 (1700년) | 3월 2일: 다이로 직 면직.[2] |
겐로쿠 14년 (1701년) | |
호에이 7년 (1710년) | |
쇼토쿠 원년 (1711년) | |
쇼토쿠 4년 (1714년) | |
교호 2년 (1717년) | 4월 20일: 사망 (향년 62세). |
4. 인물
메이레키 2년(1656년) 3월 6일, 이이 나오오키는 제3대 히코네 번주 이이 나오타카의 넷째 아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쿠라이 씨이며, 어릴 적 이름은 키치쥬로였다. 처음 이름은 '''나오오키'''였다.
만지 원년(1658년) 아버지 나오오키가 사망하고, 같은 해 히코네 번의 세자 이이 나오시게가 폐적되자, 이이 나오즈미가 본가의 가독을 이었다. 간분 12년(1672년) 11월 27일, 나오오키는 조부 나오타카의 유언에 따라 숙부 나오즈미의 양자가 되었고, 엔포 4년(1676년) 나오즈미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어받아 히코네 번 제5대 번주가 되었다.
나오오키는 히코네 번주로서 번사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도,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엔포 6년(1678년) 곤궁과 차용금 지급을 호소한 번사 76명을 추방했고, 엔포 7년(1679년) 가중 법도를 제정했다. 시모야시키(츠키고텐)에 라쿠라쿠엔과 겐큐엔을 조성하고, 영내의 비와 호에 면한 마츠바라 항·나가소네 항을 개축하는 등 토목 사업에도 힘썼다.
조쿄 2년(1685년) 번사에 대한 융자 제도를 시작했고, 겐로쿠 4년(1691년) 가로 키마타 모리나가에게 명하여 번사의 가계와 유래를 모은 '시츄 유서서'를 편찬하게 했다. 겐로쿠 6년(1693년) 번사에게 상미를 명했고, 겐로쿠 10년(1697년) 1월 11일 추방했던 번사 76명에게 귀참을 명했다.[1] 겐로쿠 12년(1699년) 히코네 번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구미 지원을 했다.
에도 막부에서 나오오키는 엔포 8년(1680년) 류마즈메가 되었고,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제5대 장군으로 임명된 조정에 대한 답례 사절을 맡았다. 엔포 9년(1681년) 에치고 소동으로 개역된 마츠다이라 미츠나가를 에도 저택에서 맡았다. 겐로쿠 원년(1688년) 11월 닛코 도쇼구 개수 총봉행으로 임명되어, 겐로쿠 2년(1689년) 7월부터 겐로쿠 3년(1690년) 7월까지 센다이 번주 다테 쓰나무라와 협력하여 대규모 수복을 완수했다. 이러한 공로로 겐로쿠 8년(1695년) 11월 28일 에도성 어용방 입성을 명받아 로주 대우를 받았으며, 겐로쿠 10년(1696년) 6월 13일 다이로가 되었다.
겐로쿠 13년(1700년) 3월 2일 병 때문에 다이로 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겐로쿠 14년(1701년) 3월 5일 여덟째 아들 나오미치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한 후, '''나오하루'''로 이름을 바꾸고 삭발하여 각옹이라고 불렀다.
이후 나오미치, 나오츠네가 연이어 요절하자, 나오오키는 환속하여 '''나오가이'''로 개명하고 히코네 번 제8대 번주로 재임했다. 쇼토쿠 원년(1711년) 2월 13일 다이로에 재임명되었고, 관위도 정사위 상 중장까지 올랐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제6대 장군으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막신 필두인 이이 가문이 정권에 참여하여 안정화를 꾀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쇼토쿠 2년(1712년) 10월 14일, 장군 이에노부가 사망하자, 쇼토쿠 3년(1713년) 3월 26일 그의 아들인 제7대 장군 이에쓰구의 에보시 친을 맡았다. 쇼토쿠 4년(1714년) 2월 15일 열셋째 아들 나오타다가 원복하자 2월 23일 다이로 직을 사임하고 나오타다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은거 후에는 이름을 나오오키로 되돌리고, 쇼토쿠 5년(1715년) 12월 출가하여 젠오라고 개명했다. 또한 열넷째 아들 나오사다에게 1만 석을 분여하여 히코네 신덴 번을 창설하게 했다.
교호 2년(1717년) 4월 20일, 나오오키는 히코네에서 62세로 사망했다. 유해는 역대 번주들과는 별도로 에이겐지 (시가현히가시오미시)에 묻혔으며, 계명은 조쥬인 가쿠오 지쇼이다.
열두째 아들 나오노리는 동족인 토오토미카케가와 번주 이이 나오토모의 양자가 되어, 호에이 3년(1706년) 에치고요이타 번으로 이봉되었다. 가신과 딸 사이에 태어난 외손 이이 나오카즈도 요이타 번주가 되었다.
4. 1. 생애 평가
이이 나오오키는 두 번의 다이로 역임, 가독 상속, 네 번의 개명 등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역대 번주 중에서는 이이 나오마사・나오타카 부자에 이어 이이씨 중흥의 조로 평가받고 있다. 막부 말기의 이이 나오스케도 나오오키를 존경하여 본보기로 삼았다.[2]- 겐로쿠 8년(1695년) 영내 모든 백성(약 27만 명)에게서 1문씩의 보화금을 모아 히코네 성의 북동쪽 방향(귀문)에 조슈인(다이도 벤자이텐)을 건립했다. 조슈인은 극채색으로 난간에 잠자는 고양이와 코끼리 조각이 있어 '히코네 닛코'라고 불린다.
- 후다이 다이묘로서 노가쿠에 관심이 있는 집안은 드물었지만, 제5대 쇼군 쓰나요시가 노가쿠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나오오키는 조쿄 3년(1686년)에 55명이나 되는 노 배우를 한꺼번에 고용했다. 그러나 겐로쿠 14년(1701년) 은거할 때 1명을 제외하고 전원 해고했다.
- 다이로 재임 중에는 제7대 쇼군 이에쓰구의 후계 문제나 에도의 에도 섬 사건 등에 대처했다. 덴나 1년(1681년)에는 불행한 행실을 책망받아 개역된 사카이 타다요시를 맡기도 했다.
4. 2. 사회 공헌
겐로쿠 8년(1695년), 이이 나오오키는 영내 백성 약 27만 명으로부터 1문씩의 보화금을 모아 히코네 성의 북동쪽(귀문)에 조슈인(다이도 벤자이텐)을 건립했다.[1] 조슈인은 진언종 다이고파의 절로, 일본 3대 벤자이텐 중 하나로 꼽히는 벤자이텐 좌상을 안치하고 있다. 건물은 화려한 극채색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난간에는 잠자는 고양이와 코끼리 조각이 있어 '히코네 닛코'라고 불린다. 조슈인의 누문은 문을 액자처럼 보이게 하여 정면으로 히코네 성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4. 3. 예술적 면모
이이 나오오키는 노가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노가쿠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나오오키는 1686년(조쿄 3년)에 55명이나 되는 노 배우를 한꺼번에 고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1701년(겐로쿠 14년) 은거할 때에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해고했다.[2] 이러한 일화는 그의 예술적 취향과 변덕스러운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다.4. 4. 정치적 수완
이이 나오오키는 다이로 직을 두 번 역임하면서 에도 막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제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의 후계 문제나 에도의 에도 섬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처리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2] 덴나 원년(1681년)에는 행실 문제로 개역된 사카이 타다요시를 맡는 등, 어려운 상황에도 능숙하게 대처했다.5. 가계
이이 나오오키는 1656년 3월 6일, 이이 나오타카(제3대 번주)의 넷째 아들인 이이 나오오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쿠라이 씨이다. 어릴 적 이름은 키치쥬로였으며, 처음 사용한 휘(이름)는 '''나오오키'''였다. 1658년에 아버지 나오오키가 사망하고, 같은 해 히코네 번의 세자 이이 나오시게(나오타카의 장남)가 폐적되자, 이이 나오즈미(나오타카의 다섯째 아들)가 본가의 가독을 이었다. 조부 나오타카는 나오오키의 아들인 나오오키에게 후사를 잇게 하도록 유언했고, 1672년 11월 27일에 숙부 나오즈미의 양자가 되었다.
5. 1. 가족 관계
구 분 | 내 용 |
---|---|
아버지 | 이이 나오쓰나 |
어머니 | 사쿠라이 씨 |
양아버지 | 이이 나오즈미 |
부인 | 도모코로시 씨 |
여덟째 아들: 이이 나오미치 | |
부인 | 오하시 씨 |
열째 아들: 이이 나오쓰네 | |
부인 | 데라자와 씨 |
열두째 아들: 이이 나오노리 | |
부인 | 다야마 씨 |
열셋째 아들: 이이 나오타다 | |
부인 | 히라이시 씨 |
열넷째 아들: 이이 나오사다 | |
부인 | 우에하라 씨 |
딸: 이이 나오토모의 부인 | |
부인 | 미야모토 씨 |
딸: 아베 마사타카의 부인 | |
부인 | 사토미 씨 |
딸: 이누이 야스시게의 부인 | |
딸: 산조 킨미츠의 부인 | |
부인 | 우메하라 씨 |
딸: 키노시타 모리요시의 부인, 후 키노시타 모리카의 부인 | |
부인 | 다케우치 씨 |
딸: 마쓰다이라 야스히로의 부인 |
참조
[1]
서적
元禄・正徳期の御大老 井伊直興と直該
郁朋社
2009
[2]
서적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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